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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Review

장사리상륙작전 실화

ooopp00 2019. 9. 25. 17:09

장사상륙작전이란?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실시된 상륙작전이다. 이 상륙작전은 성동격서의 효과를 노린 기만작전이었다.
상륙지점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장사리이다. 육군 독립 제1유격대로 지칭된 일명 明부대는 772명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부대의 주력은 학도병이었다. 772부대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이명흠 대위가 나중에 창설한 다른 부대이다. 
장사상륙작전에 참가한 학도병들은 772부대로 불리지 않았다. 또한 정식으로 "제1유격대대"로 편성된 것은 

9월 18일이다.


장사상륙작전계획

 

포항부근 현재의 7번국도로 이어지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 하는것이 작전구상이었다. 장사가 상륙지점으로 선택된

이유는 7번국도가 해안에 바싹 붙는 지점으로 상륙 후 쉽게 도로차단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의 증언중 본래 예정된 상륙지는 조금 더 북쪽에 있는 강구였으나 상륙군을 실은 배가 기동중 장사리 앞에서 좌초되어 이 지점에 상륙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국방부의 공식 간행물에는 모두 장사리가 상륙 목표지점이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 작전의 참여부대는 최초부터 학도병들이 아니었다. 낙동강전투에 모든 국군이 투입되고 6,7,8월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전속에 차출가능한 전력이 없어지게된다. 이로인해 장사상륙작전의 주력은 학도병으로 꾸려지게되었다.
이후 작전시행일자는 연기되다 육군본부는 최종적으로 9월12일에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9월14일부터 16일까지로 명령을 내린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적의 신속한 후속지원을 방해하고 적이 국군의 주공방향에 혼선을 주는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학도병들에게는 이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작전 참여한 상륙군 세력은 명부대원 760명, 통신병12명으로 총 참가세력은 828명으로, 전투인원 772명이었다. 그리고 해군 기동부대는 선원42명, 해군 헌병5명, 미군 중위1명 (안내장교), 통역1명 그리고 특별수행원 전성호 대령과 연락병 3명, 민간인 고문 박영선외 2명이 탑승했다.

 


전투

문산호는 9월14일 새벽에 상륙지점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태풍 케지아가 접근하고있었고 파고는 3-4m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배는 좌초되고 적의 시야에 노출되고 만다. 학도병들은 상륙을 감행하고 작전대로 3일동안 인민군의  보급로 차단작전을 성공시킨다. 적은 2개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학도병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러나 작전계획 3일이 지났으나 애초에 상륙군을 싣고온 문산호가 좌초되어서 복귀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본부와의 통신 또한 두절되었다. 결국 학도병들은 육로로 남하해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인민군은 제5사단의 정예부대 2개 연대의 부대와 T34/85 전차 4대를 투입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전투중 미군과 통신이 복구되었고
미군은 철수지원함을 보내주게되었다. 학도병들은 탈출을 위해 다시 장사동 해변으로 귀환, 유엔군 함대와 전폭기의 폭격지원을 받으며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철수지원함인 조치원호 역시 해안에 접안할 수 없었고 육지에서 밧줄로 배를 연결하여 승선을 시작했다. 이러던중 다수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적의 사격이 배에까지 집중되기 시작하자 후위에 남아 다른부대원의 승선을 도운 39명을 해안에 남겨둔채 조치원호는 철수하고 말았다. 생환한 부상자110명,전사자 실종자129명(포로39명포함)이 된다.

 

 


전과

이처럼 처절하게 치룬 전투속에서도 전과는 눈부셨다. 사살 270명, 포로4명을 잡았다. 방어시설 토치카 11개소 파괴
적의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 도로 6개를 파괴했다. 이 외에도 전투중 적의 무기를 노획하여 전투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친필로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에피소드

 

전투에 참여했던 학도병들은 고작 2주간의 훈련을 받은 수 전투에 참가했다. 이로미뤄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오합지졸에 전투가 시작되자마 도망가거나 항복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실제는 훌륭히 싸우고 돌아온 승리의 전투였다. 

실제로 작전계획이 3일 이었으니, 3일간 싸울수 있는 식량과 탄약을 보급받았다. 9월14일에 장사리에 상륙해서 9월19일에 이들을 태울 조치원호가 도착할때까지 6일간 사투를 벌였다. 부족한 탄약을 아껴서 사용했고, 준투중에 노획한 적군의 무기와 탄약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상륙함정은 고작 1척으로 문산호는 상륙 초기 좌초되어 복귀할 배가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상륙중 무전기는 바닷물에 젖어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고,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 비극적이고 슬픈 싸움은 오로지 학도병 772명이 벌인 처절한 전투였다. 고작 중학생 고등학생 정도의 학생들이 나라를 위해 젊은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음에 감사해야한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존재하게 만든 거름이 되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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